본 칼럼은 만화 『천막의 자두가르』의 무대가 되는 땅의 역사나 문화를 연재 형식으로 소개하는 칼럼입니다.
제28막에는 '만약 초원을 통일한 게 몽골족이 아니라 메르키트족이라면'이라는 대사가 등장합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고 하지만, 실제 몽골 제국이 성립하기 전 시대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조건이 조금만 달랐더라면 칭기즈 칸이 아닌 다른 사람이 지도자가 되었을 지도…?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칼럼에서는 몽골 제국이 성립하기 전 유라시아 대륙 중앙부는 어떤 상황이었는지와 칭기즈가 지도자가 된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소개하려 합니다.
| 역사의 사이클
유라시아 대륙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의 역사를 긴 안목으로 보면, 대륙의 대부분을 거대 제국이 통일한 시대와 거대 제국이 차례로 위기를 맞이해 분열하는 시대가 반복되는 일종의 사이클이 반복된다는 설이 있습니다.
통일 (~2세기경) 거대 제국: 한, 흉노, 마우리아 왕조, 로마 제국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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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 (3~6세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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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7~8세기경) 당나라, 돌궐, 위구르, 토번, 아바스 왕조, 비잔틴 제국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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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 (9~12세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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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13~14세기경) 몽골 제국
이 설에 따르면, 몽골 제국이 성립하기 전 시대는 세계가 분열된 상태였던 9~12세기로 구분되는 모양입니다. 이 시대 유라시아 대륙엔 다양한 국가나 문화, 종교가 늘어섰습니다. 이에 더해 중세온난기라 불리는 따뜻한 기후 덕에 인구가 증가했고, 농업이나 상업이 확대되어 원거리 교역도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라시아 대륙 동부의 송나라는 안정적인 기후를 바탕으로 농업과 상업이 발전해 도시가 번영했습니다. 북쪽에는 요나라, 서하, 금나라 등 이른바 정복 왕조의 신흥 국가가 들어서며 독자적인 문화(요나라의 거란 문자, 서하의 서하 문자, 금나라의 여진 문자 등)를 꽃피우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시기 일본에서도 일본만의 독자적인 문화(대표적으로 2024년 일본에서 방영한 대하드라마 「빛나는 당신에게」의 주인공 무라사키 시키부가 쓴 『겐지 이야기』 등)가 태어났습니다. 3
또, 같은 시기 튀르크계 사람들이 유라시아 중앙부에서 서쪽으로 대거 이동해 노예 군인(맘루크)으로 중용되거나 셀주크 왕조를 건국하기도 했습니다. 아바스 왕조의 군주(칼리파)는 이슬람 사회의 최고 지도자였습니다. 하지만 10세기경부터 권위가 실추되었고 그 대신 부와이 왕조나 파티마 왕조, 호라즘 샤 왕조 등이 세력을 뻗으며 각지가 분파되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유라시아 대륙 서부로 눈을 돌려 보면, 해상 교역 경로를 장악한 인도의 촐라 왕조나 말레이시아 자와 섬의 케디리 왕국도 번영했습니다.
| 주인 없는 몽골 고원
지금까지는 세계를 전체적으로 바라보았으니 이제부터는 몽골 고원, 특히 고비 사막 이북 지역으로 눈을 돌려 봅시다.
고대 몽골 고원에는 흉노(기원전 3세기~기원후 1세기), 선비(1세기~4세기), 유연(4세기~6세기), 돌궐(6세기~8세기), 위구르(8세기 중반~840년 해체) 등 유라시아 대륙 중앙에 넓게 펼쳐진 유목 국가가 들어서길 반복했습니다. 하지만 몽골 제국이 건국된 1206년 직전인 12세기 후반은 이런 대국이 나타나지 않는 '주인 없는' 시대였습니다.
이 공백의 시대, 몽골 고원에는 유목민 세력이 빽빽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큰 세력이라고 해도 작은 국가 정도였고, 이후 칭기즈 칸을 배출하는 세력을 포함한 다른 세력은 좀 더 작은 규모의 집단이었습니다.
이렇게 길게 이어진 군웅할거의 시대, 당시 유목민들 사이에서는 고원을 통일할 지도자가 나타나길 바라는 기운이 높아지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과정을 자세히 기록한 역사서가 턱없이 부족한 게 현실입니다.
하지만 1203년~1206년 4년간 테무진(후의 칭기즈 칸)이 케레이트나 토오릴, 나이만의 타양 칸, 메르키트의 톡토아 베키 등 주변 세력의 유력자를 차례차례 격파하고 몽골 고원의 유목민을 통일해 라이벌이었던 자무카나 적대하던 친척들을 처형한 뒤 몽골 제국을 건국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이 4년간의 전투는 이른바 유목민을 통일할 지도자를 고르는 경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지도자 후보는 테무진 외에도 여럿 있었지만, 경주에서 승리를 거머쥔 건 테무진이었다는 거죠.
그렇다면 테무진이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 초원이 낳은 지도자
테무진이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의론이 분분합니다. 본 칼럼에서는 고고학적 관점에서 연구 중인 학자 시라이시 노리유키의 견해를 소개하려 합니다.
1203년 이전 테무진의 생애에는 불분명한 점이 많습니다. 『몽골비사』에 따르면 몽골족의 명문가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 아버지 예수게이가 독살된 후로부터는 가난한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냈다고 합니다. 이대로 역사에 이름 하나 남지 않은 일개 유목민인 채로 생을 마감했어도 이상할 게 없었습니다.
이런 테무진이 케룰렌 강 상류에서 철재를 발견한 뒤 흐름이 바뀌었습니다. 이후 테무진은 말과 철 산지인 동시에 교통이 편리한 바양 오란 지역을 손에 넣고 그곳을 거점으로 삼습니다. 케룰렌 강 상류에서 철을 얻은 테무진이 기마군단의 기동력을 높이고 철재 채굴지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비전을 포함해 말, 철, 길을 중시하게 되었다는 걸 보여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바양 오란을 거점으로 삼은 후 테무진은 철제 마구를 경량화하기 시작합니다. 말의 몸에 주는 부담을 줄이고 철재를 절약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 주변의 다른 기마군단도 철제 마구를 경량화했지만, 테무진의 경량화에는 다른 기마군단과 구별되는 점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철재를 수입할 때 철광석보다 가공이 쉬운 주괴를 선택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기존에는 금나라에서만 수입하던 철재를 서하 등 다른 철 산지를 공략한 뒤 길을 닦아 안정적으로 수입할 수 있게 했다는 것입니다. 길을 닦은 데에는 고원 내의 생산활동을 비약적으로 진보시키고 몽골인의 생활의 질을 높이려는 의도도 있던 모양입니다.
시라이시 노리유키는 테무진이 이런 전술을 떠올린 배경에는 유목 생활의 지혜가 반영되어 있다고 지적합니다. 비슷한 생각을 한 유목 세력의 지도자는 테무진 외에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테무진은 아버지가 죽은 후 오랫 시간 가난한 유목 생활을 하며 보내(영웅담의 고난 에피소드를 위해 과장된 부분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유목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테무진이 최종적으로 초원의 지도자가 된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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